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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lunar의 블로그 입니다. 화학 물질의 역사와 그에 얽힌 재미있는 스토리를 공유합니다.

  • 2025. 8. 4.

    by. bluelunar

    목차

      삶과 죽음, 공포와 용기, 생물학과 철학을 연결하는 정수 아드레날린

      1. 도망칠 것인가, 싸울 것인가 – 호르몬의 속삭임

      우리 몸이 극심한 위기 상황에 직면했을 때, 망설임 없이 행동을 개시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은 놀랍다. 절벽 앞에 선 순간, 혹은 맹수와 눈이 마주친 그 짧은 찰나에 인간의 뇌와 몸은 놀라운 연산과 결단을 내린다. 이 본능적인 반응을 조율하는 **주인공이 바로 ‘아드레날린’**이다. 아드레날린은 **부신수질(adrenal medulla)**에서 분비되는 카테콜아민 계열의 호르몬이며, 화학식은 C₉H₁₃NO₃이다. 이 물질은 교감신경계를 활성화시켜 심박수 증가, 혈압 상승, 기관지 확장, 혈당 상승 등의 반응을 유도하여 **‘투쟁-도피 반응(fight-or-flight response)’**을 가능하게 만든다. 하지만 우리가 아드레날린의 존재를 처음 인식하게 된 것은 실험실이나 의학적 필요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수천 년간 인류가 야생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본능의 기억에서 비롯되었다. 본능, 공포, 생존의 최전선에서 이 작은 분자가 수행해온 역할은 그 어떤 신화적 존재보다도 위대했을지 모른다.

      2. 화학이 밝힌 생명의 응급 버튼

      아드레날린이 과학적으로 규명된 것은 20세기 초의 일이다. 1901년, **일본의 화학자 타카미네 조키치(Jokichi Takamine)**가 소의 부신에서 아드레날린을 추출하는 데 성공하며 이 물질은 본격적으로 생리활성물질로 주목받게 된다. 타카미네는 이 물질을 ‘Adrenalin’이라 명명했지만, 미국의 파크 데이비스(Parke-Davis) 제약사에서는 이를 상표권으로 등록하면서 후일 ‘Epinephrine’이라는 일반명으로 표준화되었다. 이 명명 논란은 아드레날린이 과학과 상업, 국제 규약이 뒤엉킨 첫 번째 사례이기도 하다. 이후 아드레날린은 의학적으로 극한의 상황에 사용되는 생명 유지제로 자리 잡았다. 심정지 환자에게 주사되는 아드레날린, 심한 알레르기 반응에 대응하는 에피펜(EpiPen), 기도가 막히는 천식 발작의 응급 완화제로 사용되면서 이 화합물은 단순한 ‘스트레스 호르몬’에서 의료 필수 의약품으로 격상되었다.

      3. 영화 속, 뉴스 속, 우리의 일상 속 아드레날린

      “아드레날린이 솟구쳤다”는 표현은 이제 일상어가 되었을 정도로 이 물질은 과학과 일상, 대중문화의 경계를 넘나든다. 액션 영화 속 주인공이 위험을 감수하고 적을 상대하는 장면, 스포츠 경기에서 마지막 1초를 버텨내는 선수의 집중력, 그리고 고소공포증을 이겨내고 번지점프를 시도하는 사람의 심장은 모두 아드레날린의 분출을 동반한다. 이런 경험을 통칭해 우리는 ‘아드레날린 러시(adrenaline rush)’라고 부른다. 이는 단순한 감정의 고양이 아니라, 신체 전반에 퍼지는 화학적 각성 상태다. 아드레날린은 짧은 시간 동안 모든 감각을 예민하게 만들고, 혈액을 근육과 뇌로 집중시켜 인간의 반응 속도를 비약적으로 높인다. 하지만 이 ‘각성 호르몬’이 항상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장기적인 아드레날린 과다 상태는 심장, 혈관, 뇌에 스트레스를 주고, 불면, 불안, 우울증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긴장과 휴식을 조화롭게 조절해야 하는 이유이며, 호르몬도 사용 시기와 방식이 중요함을 시사한다.

      4. 신화의 경계에서 과학으로 – 인간화된 분자

      흥미롭게도 아드레날린은 20세기 중반 이후 철학과 문학에서도 매우 상징적인 소재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실존주의 문학에서는 극한 상황에서 인간의 본질이 드러나는 순간, 즉 “공포 속의 자각”을 아드레날린의 분출과 함께 묘사하기도 했다. 심지어 현대 사회에서는 아드레날린이 ‘쾌락 호르몬’처럼 소비되는 경향도 있다. 익스트림 스포츠, 도박, 범죄조직의 ‘목숨 건 체험’ 등이 일종의 ‘아드레날린 중독’을 유도하면서, 이 물질은 뇌 속 도파민 회로와 상호작용하며 쾌락-공포의 경계를 흐리게 만든다. 또한, 아드레날린은 화학자들의 자부심이기도 하다. 복잡한 합성 경로를 거쳐 만들어진 합성 에피네프린은 수백만 명의 생명을 구하는 약물로 널리 사용되고 있으며, 오늘날에도 신경전달물질 연구, PTSD 치료, 뇌 기능 조절 약물 개발의 핵심 분자로 주목받고 있다. 결국 아드레날린은 단순한 ‘흥분 물질’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경계선에서 삶과 죽음, 공포와 용기, 생물학과 철학을 연결하는 정수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