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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 8. 2.

    by. bluelunar

    목차

      인류의 숙제 말라리아의 치료제, 클로로퀸. 지금은 자가면역 질환, 암, 항염증 등 다양한 곳에 활용됩니다.

      1. 말라리아와 인류의 끝없는 전쟁

      인류 문명의 역사에서 **말라리아(Malaria)**는 언제나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수천 년 전 고대 이집트에서도 기록이 발견되며, 로마 군단의 쇠퇴와 아프리카 식민지화의 실패에도 이 질병은 주요 요인으로 작용했다. 말라리아는 모기에 의해 전파되는 *플라스모디움(Plasmodium)*이라는 원생동물 감염병으로, 고열, 오한, 혼수 등 심각한 증상을 일으키며 사망에 이르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질병을 물리친 최초의 화학무기 중 하나가 바로 클로로퀸이었다. 클로로퀸의 기원은 17세기 남미 안데스 산맥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페루 원주민들이 열병 치료를 위해 **키나 나무(Cinchona)**의 껍질을 끓여 먹었던 것이 발단이다. 이 식물에는 **퀴닌(quinine)**이라는 천연 알칼로이드가 들어 있었고, 유럽으로 이 지식이 전해지며 ‘신의 나무껍질’이라 불리는 열병 치료제가 만들어진다. 하지만 퀴닌은 얻기 어렵고, 대량 생산이 불가능했기에 화학자들은 합성 대체제 개발에 몰두하게 되었다.

      2. 화학자의 손에서 태어난 합성 생명줄

      1934년, 독일의 바이엘(Bayer)사는 퀴닌을 대체할 물질로 레지히놀 그룹이 포함된 화합물을 개발하게 되는데, 그 물질이 바로 Resochin, 즉 후일의 클로로퀸(Chloroquine)이었다. 클로로퀸은 4-아미노퀴놀린 계열의 화합물로, 체내에 들어온 후 플라스모디움의 식세포 내 소화소에 침투하여 기생충이 혈색소를 대사하지 못하도록 억제함으로써 기생충을 ‘소화불량’으로 사멸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2차 세계대전 중, 연합군은 동남아시아 전선에서 퀴닌 공급이 막히자 대체제를 시급히 찾아야 했다. 미국과 영국은 클로로퀸을 집중적으로 연구하며, 말라리아에 걸린 병사들의 사망률을 현저히 낮추는 데 성공하게 된다. 이 약은 이후 전 세계 열대 지역에서 말라리아 예방약으로 사용되며, 한때는 WHO가 권장한 1차 치료제로 자리 잡기도 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클로로퀸은 구조적으로 간단한 편에 속하지만, 복합적인 생리학적 반응을 유도하며 다양한 기생충, 심지어 자가면역질환에도 작용 가능성이 탐색되어 왔다는 점이다. 이런 다재다능한 성격 덕분에, 이후 루푸스, 류마티스 관절염 등 면역질환 치료제로도 연구되기 시작했다.

      3. 논란과 재조명 – COVID-19 시대의 클로로퀸

      클로로퀸은 한때 의학계에서 다소 잊힌 약이었다. 하지만 2020년, 세계가 COVID-19 팬데믹으로 위기를 맞이했을 때, 프랑스의 디디에 라울(Didier Raoult) 교수는 이 오래된 약물에 대해 “항바이러스 효과가 있을 수 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한다. 여기에 미국의 정치권도 가세하면서, 클로로퀸은 갑자기 ‘기적의 치료제’로 부활하게 된다. 그러나 이는 곧 과학과 정치, 언론의 충돌로 이어졌다. WHO는 임상시험을 통해 효과가 불확실하거나 오히려 위험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중단을 권고했으며, 전 세계적으로 클로로퀸의 사용은 엄격히 제한되었다. 하지만 이 사건은 클로로퀸이 단순한 말라리아 치료제가 아니라, 사회의 가치관과 신뢰, 과학 커뮤니케이션의 중요성을 되짚게 한 약물로 인식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이 과정에서 우리는 의약품의 ‘용도 외 사용(off-label use)’에 따른 윤리와 위험에 대해서도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비록 클로로퀸이 코로나19 치료제로 실패했지만, 그 후속 연구는 자가면역 질환, 암, 항염증 치료 등 다양한 방향으로 확장되고 있다.

      4. 말라리아 너머를 바라보는 화학의 눈

      클로로퀸의 화학식은 C18H26ClN3로, 중심에는 퀴놀린 고리가 있고, 염소와 알킬아민 사슬이 붙어 있어 지질막 투과와 세포 내 축적 능력이 탁월하다. 이는 말라리아 기생충의 ‘소화 소기관’ 같은 특수 환경에 깊이 침투할 수 있게 만든다. 이러한 성질은 현대 약물 설계에서도 매우 중요한 통찰을 제공해 왔다. 또한, 클로로퀸은 단순한 분자 구조 속에 인류의 고통, 전쟁, 식민지 역사, 과학적 승리, 윤리적 논란까지 품고 있는 서사적 화합물’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화학을 통해 질병을 이겨낸다는 것은 단순히 분자를 설계하는 일이 아니라, 역사와 문명, 생명을 향한 고민을 함께 담아내는 과정이다. 오늘날에도 일부 지역에서는 클로로퀸 내성 말라리아가 등장했지만, 그 대체 물질인 메플로퀸(Mefloquine), 아르테미시닌(Artemisinin) 등도 클로로퀸의 성공을 바탕으로 탄생한 후속작들이다.
      이 작은 분자는 수많은 목숨을 살렸고, 지금도 약물 설계의 교과서로 인용되고 있다.